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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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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신 전쟁은 1868년부터 1869년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에도 막부의 붕괴와 메이지 유신의 시작을 알렸다. 막부에 대한 불만과 서구 열강과의 교류, 쿠데타 등의 배경을 거쳐 도바-후시미 전투를 시작으로 에도 무혈 개성,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저항, 하코다테 결전 등을 거치며 신정부군이 승리했다. 이 전쟁은 일본의 근대화를 가속화하고, 사무라이 계급의 몰락, 중앙 집권 체제 강화, 부국강병 정책 추진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한국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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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명칭보신 전쟁
일본어 명칭戊辰戦争 (보신 센소)
시기1868년 1월 27일 – 1869년 6월 27일
장소일본
결과제국 정부의 승리
주요 결과막부의 종말
왕정복고
교전 세력 (1868년)
교전국 1황실
삿초 동맹
사쓰마 번([[File:Maru ni Jū-monji (Kutsuwa) inverted.svg|25x20px]])
조슈 번([[File:Alex K Hiroshima Mori kamon.svg|25x20px]])
도자마 다이묘
도사 번([[File:Tosa Kasiwa (No background and Black color drawing).svg|25x20px]])
히로시마 번
쓰 번
구보타 번
사가 번([[File:Japanese Crest Daki hana Gyouyou.svg|25x20px]])
오가키 번
요도 번
히로사키 번
구로이시 번
구마모토 번
교전국 2도쿠가와 막부([[File:Japanese crest Tokugawa Aoi.svg|25x20px]])
아이즈 번([[File:Flag of Aizu domain.svg|25x20px]])
다카마쓰 번
오우에쓰 열번 동맹([[File:Flag of Ouetsu Reppan Domei or the Northen Alliance in Japan.svg|25x20px]])
쇼나이 번([[File:Japanese Crest Katabami.svg|25x20px]])
오타키 번([[File:Kawari Mitsu-ogi.jpg|25x20px]])
마쓰야마 번([[File:Mitsubaaoi.svg|15px]])
조자이 번([[File:Japanese Crest mitu Tomoe 1.svg|25x20px]])
나가오카 번([[File:Marunimitsukashiwa.png|25x20px]])
센다이 번([[File:Take ni Suzume.svg|25x20px]])
모리오카 번([[File:Japanese Crest Nannbu Turu.svg|25x20px]])
구와나 번
이탈 세력쓰 번
오가키 번
요도 번
교전 세력 (1869년)
교전국 1일본 제국([[File:Flag of Japan.svg|25x20px]])
교전국 2에조 공화국([[File:Seal of Ezo.svg|25x20px]])
지휘관 (1868–1869)
제국 정부군황제: 메이지 천황([[File:Flag of the Japanese Emperor.svg|25x20px]])
참모총장:
고마쓰 친왕([[File:Japan Kouzoku Flag 16ben.svg|25x20px]])
아리스가와 친왕([[File:Japan Kouzoku Flag 16ben.svg|25x20px]])
삿초도 군:
사이고 다카모리([[File:Maru ni Jū-monji (Kutsuwa) inverted.svg|25x20px]])
구로다 기요타카([[File:Maru ni Jū-monji (Kutsuwa) inverted.svg|25x20px]])
오무라 마스지로([[File:Alex K Hiroshima Mori kamon.svg|25x20px]])
야마가타 아리토모([[File:Alex K Hiroshima Mori kamon.svg|25x20px]])
기리노 도시야키([[File:Maru ni Jū-monji (Kutsuwa) inverted.svg|25x20px]])
이타가키 다이스케([[File:Tosa Kasiwa (No background and Black color drawing).svg|25x20px]])
호소카와 모리히사
아키타 전선:
도무라 다이가쿠([[File:Flag of Kubota Domain.svg|25x20px]])
의료 고문:
윌리엄 윌리스
막부군 (1868)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File:Japanese crest Tokugawa Aoi.svg|25x20px]])
지휘관:
가쓰 가이슈([[File:Japanese crest Tokugawa Aoi.svg|25x20px]])
에노모토 다케아키([[File:Japanese crest Tokugawa Aoi.svg|25x20px]])
마쓰다이라 가타모리([[File:Flag of Aizu domain.svg|25x20px]])
시노다 기사부로([[File:Flag of Aizu domain.svg|25x20px]])
마쓰다이라 사다아키([[File:Flag of Aizu domain.svg|25x20px]])
다나카 도사([[File:Flag of Aizu domain.svg|25x20px]])
오코치 마사타다([[File:Kawari Mitsu-ogi.jpg|25x20px]])
사카이 다다즈미([[File:Japanese Crest Katabami.svg|25x20px]])
다쓰미 나오후미([[File:Flag of Ouetsu Reppan Domei or the Northen Alliance in Japan.svg|25x20px]])
곤도 이사미([[File:Flag of Shinsengumi.svg|15px]])
히지카타 도시조([[File:Japanese Crest mitu Tomoe 1.svg|15px]])
다테 무네모토
고바야시 도라사부로
에조 공화국 (1869)총재: 에노모토 다케아키([[File:Seal of Ezo.svg|25x20px]])
육군: 오토리 게이스케([[File:Seal of Ezo.svg|25x20px]])
해군: 아라이 이쿠노스케([[File:Seal of Ezo.svg|25x20px]])
프랑스 군사 고문단:
쥘 브뤼네([[File:Seal of Ezo.svg|25x20px]])
외젠 콜라슈([[File:Seal of Ezo.svg|25x20px]])
병력 규모
제국 정부군120,000명
막부군150,000명
사상자
총 사상자8,200명 이상 사망, 5,000명 이상 부상
제국 정부군1,125명 이상 사망 및 부상
막부군4,550명 이상 사망, 부상 및 포로
관련 전투
주요 전투도바・후시미 전투
고슈 가쓰누마 전투
에도 개성
우에노 전쟁
우쓰노미야 성 전투
호쿠에쓰 전쟁
도호쿠 전쟁
하코다테 전쟁

2. 배경

19세기 중반, 일본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으로 인해 외국과의 교류가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면서, 일본 사회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막부는 서구 열강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고, 이는 존왕양이 운동과 같은 반(反)막부 정서를 불러일으켰다.[10]

고메이 천황불평등 조약을 비판하며 1863년에는 양이 칙명을 내리기도 했다.[11][12] 그러나 사쓰에이 전쟁시모노세키 전쟁을 거치면서 양이 운동은 다소 완화되었고, 조슈번의 반란과 제1차 조슈 정벌 또한 큰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다.

사쓰마번조슈번 등은 막부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과 같은 서구 열강과 협력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10][12]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는 이들에게 무기를 판매했고, 해리 스미스 파크스 영국 대사는 반막부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어니스트 새토우와 같은 영국 외교관들과 교류하며 막부 타도 세력을 키워나갔다.[17]

에도 막부 보병부대 훈련 모습


에도 막부 역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강화했다.[14] 나폴레옹 3세의 군사 정책을 본받아 신식 해군을 구축하고, 프랑스 군사 고문단을 초빙했으며, 미국 남북 전쟁에서 사용된 철갑함 고테쓰(Kotetsu)를 구입하기도 했다.

1866년, 막부는 조슈번을 제압하기 위해 제2차 조슈 정벌을 단행했지만 실패하면서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사쓰마번조슈번삿초 동맹을 맺고 막부 타도를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했다.[22] 1867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통해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환하는 듯 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막부가 유지하려 했다.[24][25][26] 이에 반발한 사쓰마 번과 조슈 번 등은 1868년 1월,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신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막부 세력을 축출했다.

사쓰마 번은 조슈 번과 함께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천황에게 공작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867년 10월 13일과 14일에는 막부 타도의 밀칙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통해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하면서 막부 타도의 명분이 약해졌고, 밀칙은 연기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공의정체론에 따라 도쿠가와 종가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에도에서 낭인들을 이용하여 혼란을 야기했고, 이는 에도 사쓰마 번 저택의 소각 사건으로 이어졌다.[108]

에도 사쓰마 번 저택의 소각 사건의 그림. 주간지 일러스트라시옹에 게재.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오사카의 구 막부 세력을 격분시켰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아이즈 번, 쿠와나 번 등을 이끌고 교토로 진군하게 되었다.

2. 1. 막부에 대한 불만

1854년 이전 2세기 동안 일본은 에도 막부에 의해 데지마를 통한 네덜란드와의 무역, 류큐를 통한 중국과의 무역을 제외하고는 외국과의 교역이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그러나 1854년 도쿠가와 막부가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대외 무역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막부가 외국과 체결한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일본 내에서 외국인 혐오 감정과 함께 반막부 정서가 커지면서 사쓰마번조슈번을 비롯한 여러 지방 번국에서 존왕양이 운동이 일어났다.[10]

고메이 천황은 이러한 정서에 동의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평등 조약을 맹렬히 비판하며 도쿠가와 막부를 비판했다. 막부 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고메이 천황이이 나오스케가 미·일 수호 통상조약을 비롯한 여러 조약 추진 및 체결 과정에서 천황의 칙허를 받지 않고 조약을 맺은 사실에 대해 불신을 드러냈고, 분큐 3년(1863년)에는 양이의 칙명을 내리기도 했다(분큐 3년 3월의 양이 칙명). 그 영향으로 일본 내에서 외국인 습격 사건 등의 양이 운동이 발발했다.[11][12]

그러나 이러한 양이 운동은 사쓰에이 전쟁과 다국적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동시에 조슈번의 존왕양이 세력이 교토를 장악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도쿠가와 막부 세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막부는 조슈번을 압박하기 위해 제1차 조슈 정벌을 감행했으나 큰 무력 충돌은 없었다. 조슈번 지도자들과 천황을 비롯한 반막부 세력의 저항은 일시적으로 가라앉았지만, 이후 반막부 정서를 가진 많은 다이묘들이 막부의 명을 무시하기 시작하면서 에도 막부는 일본 전국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서서히 드러났다.[13]

2. 2. 외국과의 교류

사쓰마번, 조슈번 등은 막부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 등 서구 열강과 긴밀히 협력하며 군사력 근대화를 추진했다.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는 이들 번국에게 군함과 총을 판매했고, 영국 대사 해리 스미스 파크스는 반막부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10][12] 이 과정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이노우에 가오루 등은 어니스트 사토우를 비롯한 영국 외교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17]

에도 막부 또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 강화에 나섰다. 나폴레옹 3세의 군사 프로젝트에 영향을 받은 막부는 프랑스 군사 전문가에 의존했으며, 크림 전쟁이탈리아 전쟁의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었다.[14] 막부는 신식 해군을 구축하여 8척의 증기군함을 보유,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게 되었다. 1867년 프랑스 군사 고문단이 파견되었고, 미국 남북 전쟁에서 사용된 철갑함 고테쓰(Kotetsu)를 구입했다.

하지만 이러한 서구 열강과의 협력 관계는 열강 간의 경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2. 3. 쿠데타

1866년, 막부는 조슈번을 제압하기 위해 제2차 조슈 정벌을 단행했지만 실패했다. 이는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고,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비밀리에 동맹(삿초 동맹)을 맺고 막부 타도를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했다.[22] 1867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통해 형식적으로는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환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막부가 유지하려 했다.[24][25][26] 이에 반발한 사쓰마번과 조슈번 등은 1868년 1월,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신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막부 세력을 축출했다.

4정의 회의 붕괴 이후, 사쓰마 번은 장주 번과 함께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할 것을 목표로 하며 천황에게 공작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867년 10월 13일과 14일에 막부 타도의 밀칙이 사쓰마와 장주에 내려졌다.

이를 받아 서국과 동국에서 동시에 거병할 계획이 세워졌다.

그러나 10월 14일, 에도 막부 제15대 장군 도쿠가와 케이키는 일본의 통치권 반환을 메이지 천황에게 봉정하고, 다음날 15일에 칙허를 받았다(대정봉환). 10월 21일 사쓰마와 장주 양 번에 '막부 타도 실행 연기의 사태서'가 내려졌고, 막부 타도의 밀칙은 연기되었다. 이미 대정봉환이 이루어져 막부는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했기 때문에 막부 타도의 명분이 서지 않아, 사쓰마 측도 동국에서의 거병 중지 명령을 에도의 사쓰마 번 저택에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케이키는 10월 24일에는 정이대장군 직책의 사임도 천황에게 청했다. 천황은 상소의 칙허에 맞춰 국사 결정을 위한 제후 회의 소집까지를 조건으로 긴급 정무 처리를 계속 케이키에게 위임하고, 장군 직책도 잠시 종전대로 유지했다. 즉, 실질적으로 '대정봉환'은 공문으로 변하고 케이키에 의한 정권 장악이 계속되는 것으로 되었다. 케이키의 목표는 공의정체론 아래 도쿠가와 종가가 수반이 되는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데 있었다고 한다.

토사 번사 이누이 타이스케(이타가키 타이스케)는 신무 창국 이래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왕정복고(황권 회복론)를 주창하고, 대정봉환이 공문화되고 막부 체제가 유지되는 것을 우려하여 고토 쇼지로 등의 건의에 의한 공의정체론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황권 회복론은 후에 자유민권운동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토사 번의 최고 지도자인 야마우치 요도는 "타이스케 또 폭론을 뱉는가"라고 웃으며 상관하지 않았고, 도쿠가와 은혜를 입은 상사 중에서 대정봉환론이 주류를 차지하면서 과격한 무력 막부 타도론은 멀어지고 반대 의견을 관철했기 때문에 이누이는 모든 직책을 박탈당하고 실각했다.[107]

게다가 예정된 정식 제후 회의 개최가 난항을 겪었다. 웅번 5번(사쓰마 번, 에치젠 번, 오와리 번, 토사 번, 게이슈 번)은 이에 격분하여 12월 9일에 천황에게 간청하고, 공가 이와쿠라 도모미의 봉정에 의해 메이지 천황이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막부 폐지와 새로운 체제 수립을 선언한 것으로, 새로운 체제에 의한 조의에서는 사쓰마 번의 주도로 케이키에 대해 내대신 직 사임과 막부 영지의 천황에게 반환을 결정하고(사관납지), 금문의 변 이후 교토에서 쫓겨났던 장주 번의 복권을 인정했다. 이렇게 금문의 변에서 교메이 천황이 있는 교토 고쇼를 향해 포격하고 조적 선고를 받았던 장주 번주 모리 요리치카는 메이지 천황에 의해 조적 인정이 해제되었다.

케이키는 사관납지를 거부했지만, 표면적으로는 "공순하고 부하의 폭발을 억누르기 위해"라고 칭하며 니조 성에서 오사카 성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제적·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인 오사카를 장악하고 그 후의 정국에서 막부 측이 유리한 위치에 서려고 책략을 썼다고 여겨진다. 게다가 12월 16일, 케이키는 각국 공사에게 왕정복고를 비난하고 조약 이행과 각국과의 교제는 천황이 아니라 자신의 권한 하에 있다고 선언했다. 새로운 정부 내에서도 야마우치 요도(토사 번), 마쓰다이라 하루아키(에치젠 번) 등 공의정체파가 부활하고 도쿠가와 측에 대한 일방적인 영토 반환은 철회되었으며(새로운 정부의 재원을 위해 제후 일반에게 경비를 부과하는 명목으로 변경), 연말에는 케이키가 상락하여 의정에 취임하는 것이 확정되는 등, 이누이 등이 우려한 대로 사관납지는 사실상 형해화되고 있었다.

; 사쓰마 용역도의 등장

보신 전쟁 중의 사쓰마 번사. (채색 사진, 펠리체 베아토 촬영)


기본·고케닌을 중심으로 하는 막신이나 조막파 제후를 도발하기 위해 사쓰마 번사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에도에서, 처음에는 이누이가 토사 번 저택에 숨기고 나중에 사쓰토 타도의 밀약에 기초하여 미타의 사쓰마 번 저택으로 이관했던 나카무라 유키치, 소라쿠 소우조우 등 근왕파 낭사들을 이용하여 데루야마를 비롯한 관동 각지에서의 거병이나 에도의 교란 작전을 개시했다. 매일 밤, 철포까지 가진 무뢰한이 무리를 지어 에도의 상가에 침입했다. 일본바시의 공의 용역 하리마야, 구라마에의 자사 이세야, 혼고의 다카사키야 등 대가가 잇달아 습격당하고 가족이나 인근 주민이 참살당하는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반드시 사쓰마 번 저택으로 도망쳤다.

에도 시민은 이 낭사 집단을 '사쓰마 용역도'라고 부르며 두려워했고, 밤의 에도 시가지에서는 사람이 사라졌다고 한다. 사쓰마 번 저택을 근거지로 하고 있던 낭사 집단, 후의 적보대는 총원 500명 정도로 여겨지고, 그 대부분은 돈으로 매수된 말 그대로 인별장에서도 제외된 무뢰한이며 강도, 살인, 방화 등을 좋아하는 무리였다.

막부는 쇼나이 번에 에도 시가지 단속을 명령했지만, 당시의 정치 상황을 숙지하고 낭사를 자극하지 않도록 했다. 그 때문에 활동은 더욱 격화되어 에도뿐만 아니라 시모쓰케, 사가미, 카이 등 주변 지역까지 확대되었다.[108]

12월 23일에는 에도 성 니시노마루가 소실되었다. 이것은 사쓰마와 통한 오쿠조메이의 범행이라고 소문났다. 같은 날 밤, 에도 시가지 경비에 종사하고 있던 쇼나이 번의 순라병 둔소에 대한 발포 사건이 발생하고, 이것도 동번이 관여한 것으로 여겨져 마침내 로쥬 이나바 마사쿠니는 쇼나이 번, 이와쓰키 번, 사바에 번 등으로 구성된 막부군을 편성하고 에도의 사쓰마 번 저택을 습격시켰다.

12월 25일, 막부군은 미타의 사쓰마 번 저택을 포위하고 사쓰마 번이 범인의 인도를 거부한 것을 받아 사쓰마 번 저택을 포격했다(에도 사쓰마 번 저택의 소각 사건). 이 사건의 소식은 에도에서 막부 측과 사쓰마 번이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는 해석과 함께 오사카 성의 막부 수뇌부에도 전달되었다.

일련의 사건은 오사카의 구 막부 세력을 격분시키고, 기세를 올리는 아이즈 번, 쿠와나 번 등 제후 병을 케이키는 제지할 수 없었다.

케이키는 천황에게 사쓰마 번의 죄상을 고하는 상소(타사표)를 제출하고 간신인 사쓰마 번의 소탕을 내걸고 부하의 막부 보병대, 아이즈 번, 쿠와나 번을 주력으로 하는 군세(총독 오타키 번주 마쓰다이라 마사타다)를 교토로 향해 행군시켰다.

3. 충돌의 시작

1867년 후지산 근처의 막부군. 프랑스 장교 쥘 브뤼네의 그림에는 서구와 일본 장비가 절충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도바 후시미 전투 이전부터 막부와 사쓰마·조슈 양 번은 각각 서양 열강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 근대화를 추진했다. 막부는 1865년부터 프랑스에 군사 훈련과 무기 지원을 요청했고, 프랑스는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막부를 지원했다. 이는 영국이 프랑스와 경쟁하며 자체 군사 원정대를 파견하는 계기가 되었다.[14]

사쓰마 번은 가고시마 포격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더욱 가까워졌고, 영국의 지원을 받아 육군과 해군을 근대화했다.[10][12] 스코틀랜드 상인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는 사쓰마와 조슈 등 남쪽 번들에게 다량의 군함과 총기를 판매했다.

영국 대사 해리 스미스 파크스는 막부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막부 반대 세력을 지원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남부 지도자들은 영국 외교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막부 역시 분쟁에 대비하여 군대를 현대화했지만, 영국은 막부의 주요 외국 파트너였음에도 지원을 주저했다. 결국 도쿠가와 막부는 프랑스의 군사적 전문 지식에 의존하게 되었다.

막부는 8척의 증기 군함을 중심으로 한 해군을 건설하여 아시아에서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865년 프랑스 기술자 레옹스 베르니에 의해 요코스카에 일본 최초의 현대식 해군 조선소가 건설되었다. 1867년 프랑스 군사 원정대가 막부군을 재편성하고 정예 부대인 전주대를 창설했으며, 미국 남북 전쟁 중 남부 연합군 해군을 위해 건조된 프랑스제 철갑선 CSS ''Stonewall''을 구입했다.[21]

조슈와 사쓰마 군대는 암스트롱포, 미니에 소총과 개틀링 건으로 완전히 현대화되었다.[36][35] 반면 막부군은 장비 면에서 다소 뒤처져 있었지만, 프랑스 군사 고문단이 정예 부대를 훈련시켰다.[36]

3. 1. 도바-후시미 전투

도바 전투


게이오 4년(1868년) 1월 2일 저녁, 막부 군함이 효고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사쓰마번 군함을 공격하면서 사실상 전쟁이 시작되었다.[109] 도쿠가와 요시노부오사카의 외국 공사들에게 사쓰마번과의 교전이 시작됨을 통보했고, 그날 밤 오사카의 사쓰마번 저택을 습격했다. 같은 날 교토 남쪽 도바 및 후시미에서 사쓰마·조슈로 구성된 삿초동맹군과 막부군이 충돌하면서 도바 후시미 전투가 시작되었다.[109] 이날 막부군은 약 15,000명으로 프랑스식 신식 훈련을 받은 이들이었고, 사쓰마와 조슈 군대는 병력에서 3:1로 열세였지만, 최신 미녜총과 엔필드총으로 무장하고 암스트롱 곡사포와 약간의 개틀링 포를 보유하는 등 완전히 근대화된 군대였다. 첫날 막부군은 서전의 혼란과 지휘 및 전략의 부족 등으로 고전했다.

조슈번 군대와 요도성에서 후퇴하는 막부군


다음 날인 1월 4일, 막부군의 후퇴가 계속되었고, 신정부는 닌나지노미야 요시아키라 친왕을 정벌 대장군으로 삼아 금기(錦旗)·절도(節刀)를 하사하고 출진 명령을 내렸다. 사쓰마군이 공식적으로 관군이 된 이후 도사번도 신충대(迅衝隊)·호접대(胡蝶隊)·단금대(断金隊) 등을 편성하여 금기(錦旗)를 하사받고 관군에 임명되었다. 반면 도쿠가와 막부군은 반란 세력으로 규정되어 좌막파 제번(佐幕派諸藩)들이 크게 동요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요도번은 막부군의 입성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막부군은 요도번의 성곽 도시를 방화하고 야와타 방향으로 후퇴했다. 1월 6일, 막부군은 야와타·야마자키에서 삿초동맹군과 대결했지만, 야마자키 포대에 배치되어 있던 쓰번이 막부군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막부군은 야와타 이동(以東)의 자카(京坂) 지역에서 패배하고 오사카로 철수했다.[109]

1월 6일 밤, 막부군은 여전히 총병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아군을 버리고 측근과 함께 오사카성을 떠나 바닷길로 에도로 철수했다. 요시노부의 후퇴로 막부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막부를 지원하던 번국들도 전투를 중단하고 군대를 돌렸다. 이후 막부군은 에도 방면으로 철수했다.[109]

4. 에도의 항복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한 도쿠가와 요시노부에도로 퇴각했고, 신정부군은 에도를 향해 진군했다.[42] 요시노부는 1월 15일 막부의 주전파 중심인물 오구리 다다마사를 파면하고, 2월 12일 에도성에서 나와 우에노간에이지에서 근신하며 메이지 천황에게 반항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1868년 3월 6일, 신정부는 군 회의에서 3월 15일에 에도 성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내란이 조약 국가들과의 무역에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했고, 영국 공사 해리 스미스 파크스는 신정부에 에도 총공격 중지를 요구했다. 신정부는 외국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 총공격 계획을 중지했다.

막부 육군 총재였던 가쓰 가이슈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사신을 보내 회담을 요청했고, 항복 조건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비젠(備前) 감금, 무기 및 군함 인도를 제시했다. 3월 13일 다카나와(高輪)의 사쓰마 번 저택에서 가쓰와 사이고 간 에도 개성 협상이 시작되었다. 3월 14일, 총독부 검토 결과 15일 에도 총공격이 중단되었다. 요시노부는 미토로 출발했고, 4월 21일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이 입성하면서 에도 무혈 개성이 이루어져 에도 성은 신정부 지배하에 들어갔다.

1868년 음력 4월 11일 에도 무혈 개성에 반대한 막부 신하 일부가 지바 방면으로 탈출, 후나바시 신궁(船橋大神宮)에 진을 치고 5월 24일 이치카와·후나바시 주변에서 신정부군과 충돌했다. 이 전투는 신식무기를 보유한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4. 1. 고슈-가쓰누마 전투

니시키에 『가쓰누마의 곤도 이사미 그림』


신정부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을 총독으로 임명하여 동정군(東征軍)을 편성하고, 에도로 진군했다. 한편 막부군은 고후성을 방어 거점으로 삼으려고 곤도 이사미 등이 이끄는 코요진무대(甲陽鎮撫隊, 구 신센구미)를 편성했다. 그러나 도사번이타가키 다이스케, 사쓰마번의 이지치 마사하루가 이끄는 신정부군이 고슈로 가서 고요진무대보다 먼저 고후 성을 접수했다.

고요진무대는 고후 분지(甲府盆地)에서 진군을 계속했지만, 게이오 4년(1868년) 3월 6일(3월 29일) 사이고 다카모리로부터 개전 전령을 받은 직후였던 결속력이 높은 진충대에 의해 신센구미는 격퇴되었다.[110] 신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완패한 것이다.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는 가명을 사용하여 잠복했지만, 나중에 신정부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다케다 유신으로 구성된 하치오지 천인대는 게이오 4년 3월 11일 하치오지에서 무기를 내놓고 항복했다.

4. 2. 우에노 전투

우에노 전투. 그림 제목은 『혼노지의 전투』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우에노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은신하고 있던 우에노 간에이지에는 에도 무혈 개성으로 에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조직으로 인정받았던 구 막부 세력인 창의대가 있었다. 이들의 존재는 막부 주전파로부터 "배신자"라고 불리던 가쓰 가이슈에게는 어느 정도 성과였다. 하지만 실제 그들은 신정부에 대한 저항 태세를 보이며 신정부군 병사들에게 집단 폭행 살해를 반복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쓰 가이슈와의 에도성 회담 당사자였고, 막부 공순파인 가쓰와의 관계 때문에 창의대를 어떻게든 회유하려고 했으나, 대응이 미온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대총독부는 사이고를 사령관에서 해임하고, 조슈번 출신 오무라 마스지로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오무라는 가이에다 신기 등 신중파를 제압하고 무력에 의한 섬멸을 주장했다. 신정부는 1868년 5월 1일에 창의대의 에도 시중 관리 임무를 해제한다는 통고를 하고, 신정부 자신이 창의대의 무장 해제에 나설 것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우에노 근처에서 창의대와의 충돌 사건이 빈발했다.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 및 니가타에서 센다이번 번주 다테 요시쿠니 등에 의해 오슈에치 열번동맹이 결성된 2주 후인 5월 15일(양력 7월 4일) 신정부군 약 1만 명이 창의대 약 4000명을 공격하며 우에노 전쟁이 시작되었다. 신정부군은 사가번이 장비한 신형 무기인 암스트롱포를 활용하여 창의대를 집중 공격했다. 이 포격으로 창의대는 큰 타격을 입었고, 우에노 전쟁은 단 하루 만에 신정부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4. 3. 에도 무혈 개성



샤구마(赤熊)를 쓴 도사번의 사무라이


우쓰노미야 성


1868년 3월 6일, 신정부는 에도성 총공격을 3월 15일로 결정했다. 그러나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는 전란이 무역에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여 신정부에 공격 중지를 요청했고, 신정부는 외국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 총공격을 중지했다.

육군총재(陸軍総裁) 가쓰 가이슈는 막신 야마오카 뎃슈를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사자로 보내 회담을 가졌다. 사이고는 항복 조건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비젠 감금, 무기 및 군함 인계를 요구했다. 3월 13일 다카나와의 사쓰마 번 저택에서 가쓰와 사이고 간 에도 개성 협상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3월 14일, 가쓰는 "요시노부는 은거하여 미토에서 근신할 것", "에도성은 다안가에 맡길 것" 등을 요구했고, 사이고는 총독부에서 검토 후 15일 총공격을 중지하겠다고 밝혔다.

4월 4일, 칙사 (하시모토 사네타다, 야나기하라 사키미쓰)가 에도성에 들어가 "요시노부는 미토에서 근신", "에도성은 오와리가에 위임" 등의 조건을 전달했다. 4월 11일, 에도성은 무혈 개성되었고, 성은 오와리 번, 무기는 히고 번의 감독하에 놓였다. 같은 날 요시노부는 미토로 출발했고, 4월 21일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이 에도성에 입성하여 신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5.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저항

문구의 개혁 이후 교토 수호직 및 교토 소사대로서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아이즈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와 쿠와나번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요시 형제는 교토 미마와리구미 및 신센구미를 이용하여 존왕양이파를 탄압하여 존왕양이파, 후의 신정부(사쓰마번·장주번)로부터 원한을 샀다. 또한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아이즈번과 쿠와나번은 구막부군의 주력이 되어, 이 패배로 인해 조적(朝敵)으로 낙인찍혔다.[114]

에도 사쓰마번 저택 방화 사건 토벌을 담당했던 쇼나이번 번주 사카이 다다아쓰는 신정부에 의해 아이즈번과 같은 보복이 가해질 것을 예상하고, 이후 양번은 연합하여 신정부에 대항하게 되었다(아이즈쇼나이 동맹).[114]

5. 1.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결성

문구의 개혁 이후 교토 수호직 및 교토 소사대로서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아이즈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와 쿠와나번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요시 형제는 교토 미마와리구미 및 신센구미를 이용하여 존왕양이파를 탄압하여 존왕양이파, 후의 신정부(사쓰마번·장주번)로부터 원한을 샀다. 또한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아이즈번과 쿠와나번은 구막부군의 주력이 되어, 이 패배로 인해 조적(朝敵)으로 낙인찍혔다.[114]

에도 사쓰마번 저택 방화 사건의 토벌을 담당했던 쇼나이번 번주 사카이 다다아쓰는 신정부에 의해 아이즈번과 같은 보복이 가해질 것을 예상하고, 이후 양번은 연합하여 신정부에 대항하게 되었다(아이즈쇼나이 동맹).[114]

1868년 1월 17일,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승리한 신정부는 도호쿠 지방의 대국인 센다이번의 번주 다테 요시쿠니에게 아이즈번의 토벌을 명령했지만, 센다이번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114]

2월 25일, 쇼나이번은 사자를 신정부에 파견했다. 신정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또는 아이즈번에 대한 토벌군 참가를 요구하며 입장을 명확히 할 것을 압박했지만, 사자는 군 참가를 거절했다. 아이즈번 또한 탄원서에서 천황에 대한 공순을 표명했지만, 신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사과도 하지 않았으며 무장도 해제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을 아이즈번의 천황에 대한 “무장·공순”이었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114]

3월 22일, 신정부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계속하던 아이즈번과 쇼나이번을 토벌할 목적으로 오슈 진무 총독부와 신정부군이 센다이에 도착했다. 주요 인물로는 총독 구조 미치타카, 부총독 사와 다메카즈, 참모 다이고 다다요시, 하참모 세라 슈조(장주번)와 오야마 쓰나요시(사쓰마번)가 있다. 3월 29일, 오슈 진무 총독부는 센다이번, 요네자와번을 비롯한 도호쿠 지방 여러 번에 아이즈번과 쇼나이번 토벌을 명령했다.[114]

4월 19일, 번주 다테 요시쿠니가 이끄는 센다이번 군세는 아이즈번 영내에 진입하여 전투 상태가 되었다. 한편 센다이번은 3월 26일 아이즈번에 항복 권고를 했고, 4월 21일 아이즈번은 센다이번에 항복했다. 항복 조건은 아이즈번이 무장을 유지하고 신정부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마쓰다이라 가쓰야스가 성 밖으로 나가 징계를 받고, 아이즈번의 삭봉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아이즈번은 센다이번에 합의를 뒤집는 내용의 탄원서를 전달했고, 이를 본 센다이번은 아이즈번 설득을 포기했다.[114]

4월 23일, 오슈 진무 총독부 부총독 사와 다메카즈와 하참모 오야마 쓰나요시가 이끄는 신정부군은 쇼나이번을 공격하기 위해 센다이에서 출진했다. 그러나 쇼나이번은 신정부군을 격퇴했고, 윤4월 4일 쇼나이번은 텐도성을 함락시켰다.[114]

4월 19일(윤달이 아닌 윤4월 1일 이전의 사건), 간토 지방에서 오토리 게이스케 등이 이끄는 구막부군이 우쓰노미야성을 일시 점령했다. 이 소식이 도호쿠 지방에 전해지자 센다이번에서는 아이즈번·쇼나이번과 협력하여 신정부와 적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가 되었다. 윤4월 4일, 센다이번 주석 가로 다마키 시게유키의 주도로 오슈 14번은 회의를 열고,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즈번·쇼나이번에 대한 사면 탄원서를 제출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신정부군과 적대하고 배제한다는 성명이 덧붙여졌다. 아이즈번·쇼나이번은 공순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윤4월 17일 신정부는 탄원서를 거부했다. 오슈 14번은 이를 불복하고 정벌군 해산을 결정했다.[114]

윤4월 21일, 사쓰마번사 사메지마 킨베에가 군감으로 데와 국으로의 원군인 모리오카번 병사와 함께 시치키타 숙소까지 왔을 때, 센다이번은 모리오카번의 진군을 막았다. 센다이번 메쓰케 구마가야 사이구와 스즈키 나오키는 모리오카번 병사의 대장 사와다 히사야스와 루스이 토오야마 레이조 아키노리에게 사메지마는 사쓰마번사이므로 오슈에게 좋지 않은 자이니 체포하여 넘겨주라고 전했지만, 모리오카번이 거절하여 결렬되었다. 그 후, 센다이번에서 계속해서 모리오카번 병사의 진군을 지연시키는 내용의 편지가 도착했으므로, 사메지마 킨베에는 구죠 총독과 상의하려고 출발하는 도중, (매복하고 있던) 센다이번 소인조 5명에게 살해당하고 노변에 묻혔다. 센다이번과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리오카번 병사는 철병했다.[112]

윤4월 22일, 사쓰마번사 우치야마 이에몬 쓰나쓰구, 그의 종자 타로, 사쓰마번사 니시다 쥬타로 3명이 탄약 등 7駄를 우슈로 운반하는 도중 오후카자와에서 타마키 토사의 명령을 받은 센다이번사 아라이 헤이노신, 하시모토 토요노신, 사가와 코헤이와 소인조 마쓰다 산시로, 오다 고로 5명에게 매복당하여 살해당했다. 목은 아라이가 센다이까지 가져가 시치키타 형장에 버렸다.[113]

이와 병행하여 센다이번·요네자와번을 중심으로 아이즈번·쇼나이번 사면 탄원서를 위한 회의를 신정부와 적대하는 군사 동맹으로 변경시키려는 공작이 이루어졌다. 사면 탄원서는 신정부에 거부되었으므로 천황에게 직접 건백할 방침으로 변경되었다. 윤4월 23일, 새롭게 11번을 추가하여 시로이시 회의 맹약서가 조인되었다. 더 나아가 나중에 25번에 의한 오슈 열번 맹약서를 조인했다. 아이즈·쇼나이 양번에 대한 관전을 요구한 태정관 건백서도 작성되었다. 오슈 열번 동맹에는 무장 중립이 인정되지 않고 신정부군과의 회담이 결렬된 나가오카번 등 북월 동맹 가맹 6번이 가입하여 총 31번에 의해 오슈 에치고 열번 동맹이 성립했다. 아이즈·쇼나이 양번은 열번 동맹에는 가입하지 않고 회장 동맹으로서 열번 동맹에 협력했다.[114]

구막부와 신정부 모두와 다른 군사 동맹(지방 정부)이 도호쿠 지방·니가타현·홋카이도의 “간토 이북의 북일본”에 탄생했다. 이 지방 정부는 정부의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인 “공의부”를 가지고 있었고, 여러 번의 공통된 정책 목표(전략)도 가지고 있었으며, 보신 전쟁 중에 륜왕사궁이 센다이에서 “동무 천황”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센다이 조정”이 되었다.[114]

고다이고 천황(남조)과 아시카가 다카우지(북조)가 싸운 “남북조 시대” 이후로 일본 역사상 중대한 사건이었다.[114]

요네야마~산쿠 산맥~히라가타 단애를 경계로 이북의 지방이 분립하는 사건이었으나, 천황에 대한 탄원을 목적으로 하는 각 번의 느슨한 연합이며, 공순을 권고하기 위한 회의가 도중에 반신정부 목적의 군사 동맹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원래 군사적 적대를 생각하지 않았던 번 등 각 번에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었고, 통일된 전략이 부족했다.[114]

5. 2. 주요 전투

피해를 입은 와카마쓰 성(항복 후 촬영)

  • '''시라카와 전투''': 신정부군과 구 막부군 및 오우에쓰 열번 동맹군 간의 격전. 신정부군이 승리하여 시라카와성(白河城)을 점령했다.

  • '''북越전쟁''': 신정부군과 나가오카번(長岡藩)을 중심으로 한 구 막부군 간의 전투. 나가오카번은 가와이 쓰기노스케(河井継之助)의 지휘 아래 선전했으나, 나가오카성(長岡城)이 함락되고 가와이가 부상당한 후 사망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결국 에치고 전역이 신정부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 '''이와키·하타마키 고개 전투''': 신정부군이 하마도리(浜通り) 지역에 상륙하여 이와키 다이라성(磐城平城), 니혼마쓰성(二本松城) 등을 점령하고, 소마 나카무라번(相馬中村藩)을 항복시켰다. 이로 인해 오우에쓰 열번 동맹군은 본국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 '''아이즈 전쟁''': 신정부군이 모나리 고개(母成峠)를 넘어 아이즈번(会津藩)을 공격했다. 모나리 고개 전투에서 승리한 신정부군은 와카마쓰성(若松城)을 포위 공격했고, 백호대(白虎隊)의 비극 등이 발생했다. 결국 아이즈번은 항복했다.

  • '''아키타 전쟁''': 구보타번(久保田藩)이 오우에쓰 열번 동맹을 탈퇴하고 신정부군에 가담하면서, 쇼나이번(庄内藩) 및 모리오카번(盛岡藩)과의 전투가 벌어졌다. 쇼나이번은 신조성(新庄城)을 함락시키는 등 선전했으나, 신정부군의 지원과 아이즈번의 항복으로 인해 결국 항복했다.

6. 하코다테 결전

에조로 향하는 구막부군


동함(갑철함)


보신 전쟁의 마지막 결전은 홋카이도의 하코다테에서 벌어졌다.

6. 1. 에조 공화국의 성립

혼슈에서 도쿠가와 막부가 신정부군에게 패배하자,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막부 함대를 이끌고 프랑스 군사 관계자들과 함께 홋카이도로 달아났다.[48] 이들은 홋카이도의 발전에 전념하고 독립국가 수립을 목표로 정부를 수립했다. 1868년 12월 25일, 공식적으로 에조 공화국을 건국했으며, 이는 일본 역사상 유일한 공화국이었다. 에조 공화국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하코다테에 있는 외국공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프랑스는 이에 화답했으나, 메이지 정부는 에조 공화국을 끝까지 부정했다. 초대 대통령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홋카이도를 개발하여 자체적인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는 곧바로 메이지 정부 국회에 의해 거절되었다.

1868년 겨울 동안 에조 공화국은 고료카쿠 요새를 중심으로 하코다테 남쪽 반도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다. 군대는 프랑스와 에조 공화국의 공동 지휘하에 조직되었다. 총사령관은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였다. 이들은 군대를 4여단으로 나누어 각각 프랑스군 장교의 지휘를 받도록 했으며, 군대는 다시 8여단으로 나누어 에조 공화국 장교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48]

6. 2. 결전과 항복

하코다테 해전


하코다테 전쟁


하야카와 쇼잔이 그린 1877년 고료카쿠 항복


신정부군은 홋카이도를 공격하여 하코다테 만에서의 해전에서 승리했다. 이 해전은 일본 최초의 근대 해군 간 대규모 해전이었다. 이후 고료카쿠 요새가 포위되었다.

5월 13일, 신정부군의 참모 구로다 기요타카에노모토 다케아키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에노모토는 처음에 항복을 거절했지만, 오토리 케이스케는 패배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진정으로 용감한 길이라며 항복을 설득했다. 결국 에노모토는 메이지 천황의 통치를 받아들여 1869년 6월 27일 항복했고, 에조 공화국은 멸망했다.[74]

7. 전후 처리

1868년 4월, 메이지 천황은 각 영지에서 1만 석(150kg의 쌀, 1년치 식량) 당 60명의 병사를 징발하도록 명령했다. 징발된 병사 중 1/6은 교토로 보내 황군을 편성하고, 나머지는 영지를 지키도록 했다.[49]

보신 전쟁 동안 약 12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고, 이 중 약 8,200명이 사망하고 5,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2] 전쟁에서 승리한 신정부는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1868년 말, 메이지 천황의 거처가 교토에서 에도로 옮겨졌고, 에도도쿄로 이름이 바뀌었다. 1871년에는 번(藩)이 폐지되고 현(県)이 설치되어, 중앙 정부에서 임명한 지사가 파견되었다.[75]

사무라이 계급은 사실상 몰수 및 폐지되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사무라이들이 행정직이나 기업가로 전직했지만, 일부는 빈곤에 시달리기도 했다.[75] 사쓰마, 조슈, 도사 등 남부 번 출신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수십 년간 정부 요직을 차지하며 "메이지 올리거키"를 형성했고, 원로 제도를 통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55] 1869년에는 도쿄야스쿠니 신사가 건립되어 보신 전쟁 전몰자를 기렸다.[77]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따르던 이들은 투옥되었으나, 사이고 다카모리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주장과 영국 특사 파크스의 조언으로 처형은 면했다. 이들 중 일부는 복권되어 신정부에 등용되었는데,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러시아와 중국에 사절로 파견되거나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16][79][80][81]

메이지 천황은 처음에는 외국 세력 배척을 목표로 했으나, 곧 근대화와 불평등 조약 재협상으로 정책을 전환하여 富国強兵|부국강병일본어을 추진했다.[82]

1868년 4월 8일, 교토를 비롯한 전국에 외국인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는 새로운 간판이 설치되었다.[83] 메이지 천황은 교토, 오사카, 도쿄에서 유럽 사절들을 직접 접견했으며,[84] 알프레드 에딘버러 공작을 "혈통에 있어 동등한 자격"으로 대우하기도 했다.[85]

초기 메이지 시대에 황실과 외국 세력 간의 관계는 개선되었으나, 프랑스와는 군사 원정대 파견 등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1886년경에는 프랑스 해군 기술자 루이-에밀 베르탱의 지휘 아래 일본 제국 해군의 현대 함대 건설을 지원하기도 했다.[86] 막부 말년부터 시작된 근대화 정책은 메이지 정부에서도 이어졌다.[87][88]

메이지 천황은 즉위식에서 5개조 서문을 발표하여 심의회 설치, 백성에 대한 기회 제공, "과거의 악습" 철폐, "황실 통치의 기초를 강화하기 위한" 전 세계 지식 추구를 선언했다.[89] 이러한 개혁은 1889년 메이지 헌법 발표로 이어졌다. 그러나 사무라이 계급은 징병제 도입, 세습적 명예와 봉급 상실 등으로 인해 불만을 품었고, 1874년 사가의 난, 1876년 조슈번의 반란, 1877년 사쓰마의 난 등으로 이어졌다. 사쓰마의 난은 시로야마 전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반란군이 패배하면서 종결되었다.[93]

서일본의 여러 번들은 신정부군에 항복하고 협력했다. 도카이 지방(東海地方) 및 호쿠리쿠 지방(北陸地方)에서는 오와리번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신정부는 이들 번에 대해 군사 편성 개입을 통해 근대화를 강요했다.

7. 1. 도쿠가와 가문과 구 막부 세력에 대한 처분

慶応일본어 4년(1868년) 5월 24일, 신정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사형을 감형하고, 다야스 가메노스케에게 도쿠가와 종가를 계승시키고, 슨푸 70만 석을 하사할 것을 발표했다.[2]

구 막부 세력 중 일부는 신정부에 등용되기도 했다. 하코다테 전쟁의 주모자인 에노모토 다케아키, 오토리 게이스케 등은 도쿄에 투옥되었으나, 구로다 기요타카 등의 구명 운동으로 1872년 1월에 사면되었다. 이후 에노모토 등은 메이지 신정부의 요청으로 정부 요직에 취임했다.[2]

주요 전공 상훈 및 처벌은 다음과 같다.

구분대상내용
전공 상훈
(영세 록)
시마즈 히사미쓰 부자(사쓰마번), 모리 요시치카 부자(조슈번)10만 석
야마우치 요시노부 부자(도사번)4만 석
이케다 요시노리(돗토리번), 토다 우지토모(오가키번), 오무라 스미히로(오무라번), 시마즈 타다히로(사도와라번), 사나다 유키타미(마쓰시로번)3만 석
사타케 요시타카(구보타번), 후지도 다카유키(쓰번), 이이 나오노리(히코네번), 이케다 아키마사(오카야마번), 나베시마 나오히로(사가번), 모리 모토토시(조후번), 마쓰마에 나가히로(마쓰마에번)2만 석
마에다 요시야스(가나자와번), 도자와 마사자네(신조번), 도쿠가와 요시카쓰 부자(오와리번), 아사노 나가코토(히로시마번), 오제키 마스노리(구로바네번)1만 5천 석
마쓰다이라 슌가쿠 부자(후쿠이번), 로쿠고 마사카네(혼조번), 사카키바라 마사타카(다카다번), 쓰가루 쓰구아키라(히로사키번), 도다 주쇼(우쓰노미야번), 구로다 나가토모(후쿠오카번), 아리마 요리시게(구루메번), 아키모토 히로토모(다테바야시번) 등1만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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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센다이번62만 석에서 28만 석으로 34만 석 감봉. 번주 다테 요시쿠니는 사형을 감형받고 금고 처분. 가로 6명 중 2명 처형, 2명은 할복.
아이즈번23만 석에서 무쓰 도난번 3만 석으로 이봉. 번주 부자는 에도에서 종신 금고(나중에 해제). 가로 1명 처형.
모리오카번20만 석에서 구 센다이 영지인 시로이시 13만 석으로 이봉. 가로 1명 처형.
요네자와번18만 석에서 14만 석으로 감봉.
쇼나이번17만 석에서 12만 석으로 감봉.
야마가타번오미국 아사히야마로 이봉, 아사히야마번을 설치. 석고는 5만 석으로 변동 없음. 수뇌 가로 미즈노 모토노부가 책임을 지고 처형됨.
니혼마쓰번10만 석에서 5만 석으로 감봉.
다나구라번10만 석에서 6만 석으로 감봉.
나가오카번7만 4천 석에서 2만 4천 석으로 감봉. 이미 처형된 가로 2명은 가문 몰락.
이치노세키번3만 석에서 2만 7천 석으로 감봉.
가미노야마번3만 석에서 2만 7천 석으로 감봉.
후쿠시마번3만 석에서 미카와국시게하라번 2만 8천 석으로 이봉.
가메다번2만 석에서 1만 8천 석으로 감봉.
덴도번2만 석에서 1만 8천 석으로 감봉.
이즈미번2만 석에서 1만 8천 석으로 감봉.
유나가야번1만 5천 석에서 1만 4천 석으로 감봉.


7. 2. 각 번에 대한 상벌

게이오 4년(1868년) 5월 24일, 신정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사형을 감형하고, 다안 가메노스케에게 도쿠가와 종가를 계승시키고, 슨푸 70만 석을 하사할 것을 발표했다. 또한, 여러 번에게 전공을 포상하고 신정부에 저항한 번들에게는 엄격한 처분을 내렸다.

신정부에 공을 세운 번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영지가 가증되거나 상금이 주어졌다.

영지 가증/상금
10만 석시마즈 히사미쓰 부자(사쓰마), 모리 요시치카 부자(조슈)
4만 석야마우치 요시노부 부자(도사)
3만 석이케다 요시노리(돗토리), 토다 우지토모(오가키), 오무라 스미히로(오무라), 시마즈 타다히로(사도와라), 사나다 유키타미(마쓰시로)
2만 석사타케 요시타카(구보타), 후지도우 타카유(), 이이 나오노리(히코네), 이케다 아키마사(오카야마), 나베시마 나오오(사가), 모리 모토토시(조후), 마쓰마에 가네히로(마쓰마에)
1만 5천 석마에다 요시나가(가나자와), 토자와 마사사네(신조), 도쿠가와 요시카쓰 부자(오와리), 아사노 나가이사(히로시마), 오오세키 마스토모(구로바네)
1만 석마쓰다이라 요시나가 부자(후쿠이), 무사고 마사아키(혼조), 사카키바라 마사타카(다카다), 쓰가루 요시아키(히로사키), 토다 다다요시 부자(우쓰노미야), 쿠로다 나가토모(후쿠오카), 아리마 요리카쓰(구루메), 아키모토 요시아키(다테바야시)



반면, 신정부에 저항한 번들은 다음과 같이 영지가 삭감되거나 번주가 처벌받는 등 엄격한 처분을 받았다. 특히 센다이번아이즈번은 가혹한 처분을 받았다.

처분 내용
센다이번62만 석에서 28만 석으로 34만 석 감봉. 번주 다테 요시쿠니는 사형을 감형받고 금고 처분. 가로 6명 중 2명 처형, 2명은 할복.
아이즈번23만 석에서 무쓰 토난번 3만 석으로 이봉. 번주 부자는 에도에서 종신 금고(나중에 해제). 가로 1명 처형.
모리오카번20만 석에서 구 센다이 영지인 시로이시 13만 석으로 이봉. 가로 1명 처형.
요네자와번18만 석에서 14만 석으로 감봉.
쇼나이번17만 석에서 12만 석으로 감봉.
야마가타번오미국 아사히야마로 이봉, 아사히야마번 설치. 석고는 5만 석으로 변동 없음. 수뇌 가로 미즈노 모토노부 처형.
니혼마쓰번10만 석에서 5만 석으로 감봉.
다나구라번10만 석에서 6만 석으로 감봉.
나가오카번7만 4천 석에서 2만 4천 석으로 감봉. 이미 처형된 가로 2명은 가문 몰락.
이치노세키번3만 석에서 2만 7천 석으로 감봉.
가미야마번3만 석에서 2만 7천 석으로 감봉.
후쿠시마번3만 석에서 미카와국시게하라번 2만 8천 석으로 이봉.
가메다번2만 석에서 1만 8천 석으로 감봉.
텐도번2만 석에서 1만 8천 석으로 감봉.
이즈미번2만 석에서 1만 8천 석으로 감봉.
유나가야번1만 5천 석에서 1만 4천 석으로 감봉.
쇼사이번1만 석 전부 몰수(제봉개역)(보신전쟁으로 인한 유일한 경우). 번 중신은 사형, 번주 하야시 타다타카는 투옥. 후에 사면되었지만 사족으로 남음. 후에 구 번사들의 자발적인 서훈 운동으로 양자가 다른 구 번주보다 한 단계 낮은 남작에 서임됨.



이 외에도 하치노헤번, 무라마쓰번, 무라카미번, 이와키히라번, 소마나카무라번, 미하루번, 신발타번, 미네야마번, 쿠로카와번, 시모테와타번 등은 소령이 안도되거나 가로가 처형되는 등의 처분을 받았다.

8. 보신 전쟁의 영향

도쿠가와 요시노부가택 연금에 처해졌고 모든 작위, 토지, 권력을 박탈당했지만, 나중에 석방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은퇴했던 시즈오카로 은퇴했다.[62][63]

혼슈에서 패배한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해군 잔여 세력과 프랑스 고문들을 이끌고 홋카이도로 도망쳐, 홋카이도 개발에 전념하는 독립적인 섬 국가 건설을 목표로 정부를 조직했다. 이들은 에조 공화국을 수립했지만, 국제적인 인정이나 지원을 얻지 못했다. 에노모토는 홋카이도 영토를 막부 통치하에 황실에 봉헌할 것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70]

겨울 동안 하코다테 남부 반도 주변에 방어 시설을 구축했고, 중심에는 고료카쿠 요새가 있었다. 군대는 프랑스-일본 연합군 사령부 체제로 편성되었으며, 총사령관 오토리 케이스케를 프랑스 군인 쥘 브뤼네가 보좌했다. 군대는 네 개의 여단으로 나뉘었고, 각 여단은 프랑스 부사관(아르튀르 포르탕, 장 마르랭, 앙드레 카즈뇌브, 프랑수아 부피에)이 지휘했으며, 다시 여덟 개의 반여단으로 나뉘어 각각 일본군이 지휘했다.[71]

보신 전쟁은 일본 근대화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새 정부는 궁정의 강력한 통치 아래 국가를 통일했다.
  • 천황의 거처는 교토에서 도쿄로 이전되었다.
  • 번들의 군사 및 정치적 권력은 점진적으로 제거되었고, 번들은 현으로 개편되었다.[75]
  • 사무라이 계급은 몰수 및 폐지되었고, 많은 사무라이들이 행정직이나 기업가로 전환했지만, 일부는 빈곤에 시달렸다.[75]
  • 전쟁 후 수십 년 동안 정부의 주요 직책은 사쓰마, 조슈, 도사 출신들이 차지했다.[55]
  • 1869년, 야스쿠니 신사가 건립되었다.[77]
  • 전 쇼군의 주요 추종자들은 투옥되었지만, 일부는 새 정부에 봉사하며 경력을 쌓았다.[16][79][80][81]
  • 황실은 외세 축출 대신 국가 근대화와 외국과의 불평등 조약 재협상을 목표로 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82]
  • 메이지 천황은 오사카 칙령을 발표하여 심의회를 요구하고, 일반 백성에게 더 많은 기회를 약속했다.[89]
  • 개혁은 1889년 메이지 헌법 발표로 이어졌다.
  • 초기 메이지 개혁은 사무라이들의 반발을 샀고, 1874년 사가의 난, 1876년 조슈의 반란, 1877년 사쓰마의 난으로 이어졌다. 사쓰마의 난은 시로야마 전투에서 사무라이들의 패배로 끝났다.[93]


보신 전쟁은 단순히 막부 세력과 신정부 세력 간의 무력 충돌을 넘어, 일본 사회 전체를 뒤흔든 거대한 변혁의 시작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일본은 중세 봉건 사회에서 근대 국민 국가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으며, 이는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8. 1. 메이지 유신의 가속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항복한 후,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천황의 통치를 받아들였지만, 아이즈 씨족을 중심으로 한 북부의 일부 영지들은 저항을 계속했다.[62][63] 1868년 5월, 여러 다이묘들이 북부 영지 동맹을 결성하여 황군에 대항했다. 이 동맹에는 센다이, 요네자와, 아이즈, 쇼나이, 나가오카 번 등의 군대가 포함되었으며, 총 병력은 5만 명에 달했다.[64]

1868년 5월, 나가오카 번의 ''다이묘''는 호쿠에쓰 전투에서 황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결국 성이 함락되었다. 황군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보나리 고개 전투에서 신센구미를 격파했고, 이는 아이즈 전투로 이어져 아이즈와카마쓰 성이 공격받는 결과를 낳았다.[65]

보신 전쟁 당시 센다이 영지가 사용한 목제 대포, 센다이 시립 박물관


북부 동맹은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장비가 부족하고 전통적인 전투 방식에 의존했다. 현대식 무기가 부족하여 나무로 만든 대포를 사용하기도 했다.[66] 반면, 나가오카의 ''다이묘''는 개틀링 건과 프랑스 소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67]

동맹이 무너지고, 1868년 10월 12일 함대는 센다이를 떠나 홋카이도로 향했다. 이들은 막부 잔여 병력, 신센구미 병력, 게릴라 부대, 프랑스 고문 등으로 구성되었다.[16]

10월 26일, 에도는 도쿄로 개명되었고 메이지 시대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이즈는 포위 공격을 받았고, ''백호대''의 젊은 전사들이 집단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68] 아이즈는 11월 6일에 패배를 인정했다.[69]

1868년 말, 교토에서 도쿄로 천도하는 16세의 메이지 천황


보신 전쟁에서 약 12만 명의 병사 중 8,200명이 사망하고 5,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2] 새 정부는 국가를 통일하고, 천황의 거처를 교토에서 도쿄로 옮겼다. 번들의 군사 및 정치적 권력은 점진적으로 제거되었고, 1871년에 현으로 개편되었다.[75]

사무라이 계급은 몰수 및 폐지되었고, 많은 사무라이들이 행정직이나 기업가로 전환했지만, 일부는 빈곤에 시달렸다.[75]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쓰마, 조슈, 도사 출신들은 정부의 주요 직책을 차지했다.[55] 1869년, 야스쿠니 신사가 건립되었다.[77]

전 쇼군의 주요 추종자들은 투옥되었지만, 파크스의 조언 등에 힘입어 사형을 면했다.[78] 이들 중 일부는 새 정부에 봉사하며 경력을 쌓았다.[16][79][80][81]

황실은 외세 축출 대신 국가 근대화와 외국과의 불평등 조약 재협상을 목표로 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82] 1868년 4월 8일, 외국인에 대한 폭력을 거부하는 간판이 세워졌고,[83] 메이지 천황은 유럽 사절들을 직접 접견했다.[84]

프랑스와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악화되었지만, 곧 군사 원정대가 초청되고, 프랑스 기술자 루이-에밀 베르탱의 지휘 아래 일본 제국 해군의 현대 함대 건설이 이루어지면서 상호 작용이 재개되었다.[86]

1872년 메이지 천황이 두 번째 프랑스 일본 군사 원정대를 접견하는 모습


메이지 천황은 오사카 칙령을 발표하여 심의회를 요구하고, 일반 백성에게 더 많은 기회를 약속하고, "과거의 악습"을 폐지하며, 전 세계의 지식을 추구했다.[89] 개혁은 1889년 메이지 헌법 발표로 이어졌다. 그러나 초기 메이지 개혁은 사무라이들의 이익에 해로운 것으로 여겨져 반발을 샀다. 징병제와 세습적 명예, 봉급의 상실은 많은 전직 사무라이들을 적대시했다. 긴장이 고조되어 1874년 사가의 난과 1876년 조슈의 반란, 1877년 사쓰마의 난으로 이어졌다. 사쓰마의 난은 시로야마 전투에서 사무라이들의 패배로 끝났다.[93]

8. 2. 한국에 미친 영향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급격한 근대화와 군사력 강화는 조선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특히 일본의 대외 팽창 정책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에 조선은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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